계절도 인생도 제멋대로, 갑사로 가는 길
때는 한참을 늦었지만, 아쉬운 이 가을 떠나는 끝자락이라도 붙들고 싶은 심정으로 계룡산 번개여행을 떠났습니다.
거기는 그래도 서울 보다는 남쪽이라서 계절의 걸음이 좀 더딜줄 알았는데 매마른 동학사 계곡과 바스락 낙엽 부서지는 갑사로 가는 산행길은 이미 스산한 겨울 문턱에 이르렀더군요.
오후엔 빗방울까지 예고되어 있던지라 찌푸린 잿빛 하늘마저도 낙엽을 모두 떨군 앙상한 겨울산의 을씨년스럼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어 아쉬운 마음은 더했어요.
그런데 세상 어떤 구석에든 으레 그러한 섭리에 순응하기 싫어하는 살짝 삐딱한 녀석들은 있기 마련인가봐요.
떼창을 거부하고 싱글로 나서 홀로 두드러진 몇몇 단풍들의 불타는 리사이틀은 인적 드문 산길에 오르는 우리에게 지금 이 순간은 오로지 우리만을 위한 감동의 무대임을 인지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어요.
요즘엔 봄 꽃이 가을에 피었다던가, 한달이나 일찍 또는 뒤늦게 이제서야 하는 생뚱맞은 존재들의 이야기를 더러 듣습니다.
심각한 환경 파괴로 인한 지구온난화의 영향인 것은 누구나 다 알고있는 우려 일테지만 가끔은 이 때문에 비롯된 뜻밖의 호사가 고마울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고교시절 배웠던 이상보 선생님의 아름답고 빼어난 필치로 소개된 함박눈 덮힌 동학사 경내와 갑사로 가는길에 만나는 남매탑에 전해지는 잔잔한 이야기의 추억에 이끌려 다시 갑사로 가는 오랜만의 길에 올랐지만 그래도 저는 마지막 남은 잎사귀를 떨구기 까지의 가을날에 마음이 더 기웁니다.
평소 기상청이 아니라 구라청이라는 핀잔을 들었던 오후의 비 예보가 오늘은 어김없이 갑사를 지나 주차장으로 향하는 마지막 발걸음에 빗방울을 뿌립니다.
지난 여름 유난히 잦고 많았던 비와 태풍 피해로 지긋지긋 꿉꿉한 나날을 지내야 했던 기억은 벌써 오간데 없이 마른 낙엽을 때리며 먼지를 잠재우는 투두둑 빗소리가 이젠 싫지 않습니다.
지극히 변덕스런 윌리의 하루는 계절도 인생도 그리고 코로나의 시름까지도 빗소리와 막걸리 한잔에 멋대로 녹여집니다.
조선 건국초기 도읍지로 정해졌을 만큼 뛰어난 풍수(風水)의 영험한 기가 절로 느껴지는 길지 중의 길지라는 계룡산의 벅찬 기운을 잔뜩 호흡하고 다시 올 그 봄날을 기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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